왕희지 상
왕희지 서예 작품
왕희지는 서기 303년에 랑야쥔(琅琊郡)<지금의 린이(临沂)시>에서 출생하였으며, 어려서부터 서예를 즐겨했으며, 일곱 살 때부터 붓글씨를 익히기 시작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그는 길을 걸어갈 때나 앉아서 쉴 때나 언제나 손가락으로 붓글씨를 쓰는 연습을 했다고 한다. 글자체의 구조와 필법을 속으로 곰곰이 생각하면서 손가락으로 옷에다가 한 획 한 획 그려보곤 했는데 나중에는 옷이 닳아서 구멍이 났다고 한다. 그리고 매번 붓글씨 연습을 끝낸 후에 붓과 벼루를 집 앞에 있는 못에서 씻곤 했는데 나중에는 그 못물이 다 검어졌다고 한다. 왕희지는 매일 서재에서 붓글씨 연습에 골몰했으며, 끼니때가 되어도 붓을 놓을 줄 몰랐다. 하루는 부인이 그가 좋아하는 마늘과 떡을 가져왔는데, 그는 고개도 들지 않고 붓글씨만 쓰고 있었다. 부인은 음식을 탁상 위에 올려놓고 서재를 나갔다.
얼마 후에 다시 서재로 가보니, 왕희지는 입 언저리가 온통 새까맸으며, 손에는 먹물이 잔뜩 묻은 떡을 쥐고 있었다. 그것을 본 부인은 허리가 아프도록 웃었다고 한다. 동진의 고귀한 사족 가문에서 태어난 왕희지는 벼슬하려는 마음만 있었다면 아주 높은 벼슬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왕희지는 벼슬이 싫었다. 그는 자유로운 생활이 좋았다. 나중에 절친한 사이인 양주 자사 은호(殷浩)가 하도 권하는 바람에 회계 내사라는 벼슬을 했지만, 그것도 회계라는 곳의 아름다운 산천을 구경하기 위해서이지 벼슬이 좋아서는 아니었다.
왕희지는 사안(謝安), 손작(孫綽) 등의 이름난 문인 40여 명과 함께 회계 산음현(절강 소흥현)의 난정에서 연회를 한 적이 있었다. 그때 난정에서 읊은 시 40여 수를 문인들이 엮어 『난정집(蘭亭集)』을 만들었다. 왕희지도 주흥에 겨워 이 시집에 일필휘지로 서문을 썼는데, 그 서문이 바로 「난정집서(蘭亭集序)」이다. 이 서문은 모두 28행 324자인데 그 글 솜씨가 세상에 둘도 없어서, 지금까지 중국 서예의 최고 진품으로 인정받고 있다.
왕희지는 진서(真), 초서(草), 예서(隶), 전서(篆) 등이 특출했으며 그 중에서 예서가 가장 뛰어났다. 중국 고금의 첫째가는 서성(書聖)으로 존경받고 있으며, 그의 아들 왕현지(王獻之)와 함께 "이왕"이라는 칭호를 받고 있다.
편집자:신영